[건축여행]
양평 구둔역
글 _ 김예슬 (작가)
2025년 새해가 밝았다. 의정부에서 양주를 지나 고양까지 이어지는 교외선이 다시 운행을 시작한다는 뉴스를 보았다. 2004년 기찻길이 멈춘 후 20년만이다. 기차는 총 7개 역을 거친다. 이 중 일영역은 K-POP 그룹 BTS의 ‘봄날’이란 곡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유명하다. 해가 바뀌며 멈춰있던 철길이 다시 뛰기 시작한 곳도 있지만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불리는 경상북도 대구 군위군 화본역이 그렇다. 이 역은 지난 12월 31을 끝으로 운행을 중단했다. 1938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역이니 사람으로 치면 약 90세까지 살아낸 셈이다. 다사다난했던 시대를 살아낸 작은 역이 역사 속으로 떠나는 걸 배웅하고자 코레일에서는 지하철 편의점 스토리웨이에서 워터볼을 판매하기도 했다. 하루 차이로 나이가 달라지는 듯 달력 한 장을 경계로 달라지는 기차역들의 운명이 얄궂다. 올해 새로운 역할로 문을 여는 간이역도 있다. 2012년 운행이 종료된 폐역, 양평 구둔역이다.
양평 구둔역을 처음 가본 건 2022년 초였다. 양주 일영역을 가보고 경기도에 있는 여러 폐역들을 찾아보던 중이었다. ‘경기도 폐역’을 검색해보다가 ‘영화 건축학개론 촬영지’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대학교 건축학개론 수업을 함께 듣게 된 영화 속 주인공들이 ‘요즘 날씨도 좋으니 멀리 가서 놀다 오라’는 교수님 말씀을 듣고 찾아간 역이었다. 짧게 스쳐가는 씬이었지만 기찻길 위에서 아슬아슬 중심을 잡아가며 걸어가던 두 청춘이 생각났다. 동시에 영화관에 앉아있던 대학생 시절 내가 떠올랐다. 그 길로 구둔역으로 차를 몰고 갔다
역은 외딴 곳이었다. 여름이라면 푸릇한 풍경에 눈이 즐거웠겠지만, 아직 봄이 오기 전이었던 겨울. 주변은 적막했다. 겨울잠을 자고 있는 듯 조용한 산과 논 사이로 몇 집들을 스쳐간 후 언덕 끝에 닿았다. 지붕 아래에 ‘구둔’이라고 쓰여 있던 영화 속 그 역이었다. 구둔역은 1940년 문을 열었다. 마을을 청량리와 원주로 이어주는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곳이었다. 이후 중앙선 노선 변경으로 역이 이전하게 되는데 위치가 옮겨진 후 명칭도 일신역으로 바뀐다. 구둔역은 폐역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건물은 2006년 ‘양평 구 구둔역’으로서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95㎡가 조금 넘는 작은 목조건물 안에 대합실, 숙식실, 사무실이 그대로 남아있다. 방문했던 당시 내부를 들어가 볼 수 없었지만 유리창 안으로 기차시간표가 보였다. 길게 뻗은 철길 옆에는 기차도 놓여있었다. 명절이면 고향을 찾는 사람들이 오갔겠고, 평소에는 집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이들로 생기 넘쳤을 공간이다. 언덕 끝에서 마지막까지 불을 밝히며 ‘당신은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독려해주던 등대이기도 했을 테다. 그러나 기차역의 시간은 멈춰있었다. 마치 오지 않을 누구를 기다리는 듯.
구둔역은 옛 기차역 모습이 잘 남아있어서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찾아보니 워낙 조용한데다가 밤이 되면 주변이 불빛 하나 없이 캄캄해서 별을 관찰하기 좋은 장소로 이미 유명했다. <나 혼자 산다>(2024년 6월 14일 방송분)에서 배우 공명과 가수 NCT 도영이 반딧불이를 보기 위해 폐역으로 떠난다. 기찻길에서 사진도 찍고, 역 앞 운행하지 않는 버스정류장에 앉아서 챙겨온 도시락을 먹기도 한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결국 반딧불이를 만나는데 그곳이 바로 이 곳, 구둔역이다. 구둔역은 어쩌면 기차역일 때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듯 했다. 기차를 타러 오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제는 역 자신을 보러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으니 말이다.
구둔역은 올해 아트스테이션으로 재개관될 예정이다. 경기도 지역균형발전 사업 일환으로 187억 예산이 투입되어 구둔역과 그 주변을 문화관광시설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이에 따르면 음악감상실, 소극장, 레일 산책로, 광장 등을 조성된다. 시끄러운 도심을 피해 적막을 찾아 왔던 사람들, 옛 기차역이 주는 추억과 낭만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인지는 의문이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지만 초여름이면 반딧불이를 볼 수 있고, 가을이면 붉은 단풍을 온전히 눈에 담을 수 있고, 겨울이면 차가운 밤하늘에 뿌려진 별빛으로 밝았던 구둔역. 방문자들에게 구둔역은 그 자체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경상남도 구 진주역처럼 옛 건물과 철길 주변으로 아름다운 공원과 전시공간이 조성되어 문화시설로서 역할을 다 하는 사례도 있다. 새로운 구둔역은 어떤 모습일까. 부디 잘 활용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팔짱을 풀어 두 손을 모아본다. 공사는 8월까지 진행된다고 하니 가을이면 아마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영화 <건축학개론> 이야기를 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영화 속 첫 장면은 대학교 건축학개론 수업 첫 시간이다. 교수님은 ‘내가 사는 동네를 잘 관찰해보고 사진으로 남겨보라’고 과제를 내주신다. 올해는 매일 지나치던 출근길에서, 우리 집 근처에서 아름다움을 발굴해보며 소소한 여행을 해보면 어떨까. 뭐하는 곳인지 궁금했던 건물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계절 속 풍경을 담아보는 거다. 예전에 자주 갔었지만 지금은 사라져버린 가게 자리를 가봐도 좋고, 내 눈에만 예뻐 보이는 울타리나 창문을 관찰해 봐도 좋다. 중요한 건 사소한 걸 의미 있게 보고자 하는 시선이다. 소중한 일상을 여행하듯 설레며 살 수 있기를, 그렇게 우리 모두 작고 단단한 행복으로 가득한 올해를 보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김예슬 작가 : 휴가를 내지 않고도 주말을 여행자처럼 쓰기 위해 건축 여행을 시작했다. 2015년부터 오래된 건축물을 찾아 전국을 여행했고 1,000곳이 넘는 건물을 기록했다. 대학에서는 국문학과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저서로는 서울의 근현대의 시간을 간직한 54곳의 건축 여행지를 담은 "서울 건축 여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