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순간]
스페인 Part 2.
스페인 미술관 여행기
글 / 사진 _ 길정현(여행작가)
미식 투어만큼이나 미술 투어에도 스페인은 적격인 동네지만 이를 아는 경우는 의외로 흔치 않다. ‘미술 투어’라고 하면 보통은 런던의 네셔널 갤러리나 파리의 루브르 혹은 오르세 미술관, 뉴욕의 MoMA 등을 쉽게 떠올리기 때문이리라.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호안 미로 등 걸출한 미술가들이 모두 스페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의 미술은 여전히 ‘가우디’(물론 가우디의 건축물들이 충분히 미술 작품처럼 보이기는 한다)로 대표된다.
오늘은 스페인에서 충분히 들러 볼 법한 ‘가우디가 아닌!’ 미술 투어 스팟을 소개하고자 한다.
마드리드
스페인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관광지로서의 인기로는 여전히 바르셀로나에 대적하지 못하는 마드리드. 혹자는 마드리드는 환승할 때 거치는 곳, 그 자체로는 정말 볼 것 없는 곳이라 평가하기도 하지만 미술 투어에 있어서는 바르셀로나보다 마드리드가 더 낫다. 그닥 길지 않은 동선 내에 걸출한 미술관들이 여럿 모여있고 소장 컬렉션들도 아주 빵빵하기 때문.
#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에서 단 한 곳만의 미술관을 갈 수 있다면 그 선택지는 프라도 미술관이어야 한다.
프라도 미술관은 스페인 왕실의 소장품들을 한 곳에 모아두기 위해 개관된 곳으로, 개관 이후에도 계속된 수집과 기증으로 그 수가 점점 늘어나 지금은 총 3만점 정도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고 이중 3,000점 정도를 상설 전시하고 있다.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이며 스페인의 3대 화가인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의 작품을 보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애당초 왕과 귀족들의 컬렉션에서 시작된 곳이어서 종교화, 궁정 화가의 작품들이 많으며 성격상으로는 스페인 위주의 작품들이 많다. 프라도 미술관 측이 특히 자랑스러워하는 부분은 이 곳의 작품들은 유럽의 다른 미술관에 있는 작품들과 달리 약탈이나 훔친 것이 아니라 왕실에서 모았던 것이어서 도의적으로 떳떳하다(그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에 대한 논의를 뺀다면)는 것과 그 덕에 보존 상태도 좋은 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스페인의 역대 왕들은 각자 취향에 맞는 화가를 후원하며 작품들을 구입했고 그 과정에서 왕 개개인의 개성적인 취향이 반영되기도 했다.
때문에 이 곳의 전시품들은 세계 미술사의 모든 시대, 국적, 유파, 예술의 흐름 등을 총망라한 백과사전이나 미술 교과서 같은 느낌이 아니라 개인의 독특한 취향을 반영하는 개성 넘치는 작품들이 모여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워낙 그 수가 방대하다보니 결과적으로는 유럽 미술사를 아우르는 결과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주소 : C. de Ruiz de Alarcón, 23, 28014 Madrid, 스페인
운영시간 : 10:00~20:00 (일요일은 19:00까지)
홈페이지 : https://www.museodelprado.es/
#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개인으로는 세계 2위(1위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니 감히 넘볼 수 없다)의 수집가로 꼽히는 티센 보르네미사 남작이 2대에 걸쳐 모은 수집품들을 바탕으로 개관한 미술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르네상스 초기 작품부터 시작해서 17세기 플랑드르, 18세기 프랑스, 영국, 미국 회화, 19세기 낭만주의를 거쳐 인상주의와 20세기를 뒤흔든 큐비즘, 팝아트까지, 작가들로 치면 두초 디 부오닌세냐부터 시작해서 로이 리히텐슈타인까지로 정말 엄청난 컬렉션이다.
그 자체 그대로 서양 미술사를 총 망라하는 수준으로 그 방대한 수집력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한스 홀바인, 비토레 카르파치오, 카라바조,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엘 그레코, 피터 폴 루벤스, 디에고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판 레인, 오귀스트 르누아르, 클로드 모네, 에드가 드가, 에두아르 마네, 빈센트 반 고흐, 폴 세잔, 알프레드 시슬리 등의 작품을 한꺼번에 만나볼 수 있고 이외에도 18~19세기에 활동한 미국화가 존 싱글턴 카플리, 원슬로 호머, 존 서전트 등의 작품도 볼 수 있다. 20세기 작가로는 바실리 칸딘스키, 에드바르 뭉크, 피트 몬드리안, 조르주 브라크,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 에드워드 호퍼, 잭슨 폴락,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 일일히 열거하자면 끝도 없을 지경이다.
주소 : P.º del Prado, 8, 28014 Madrid, 스페인
운영시간 : 10:00~19:00 (월요일은 12:00 ~16:00)
홈페이지 : https://www.museothyssen.org/
# 왕립 소피아 미술관
병원으로 쓰였던 건물을 개조하여 꾸린 이 미술관에서 가장 집중해서 관람해야 할 작품은 명실상부, 피카소의 <게르니카>일 것이다. <게르니카> 이전까지의 피카소가 큐비즘을 창시하는 등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면 <게르니카> 이후로는 그의 작품에 시대 의식이 반영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어 피카소라는 인물에 있어서도 <게르니카>가 가지는 의미는 크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북부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 갑자기 24대의 나치 전투기가 나타나 5만 발의 폭탄을 퍼부었다. 4시간 만에 1,600명이 사망하고 900명이 부상을 당하며 게르니카는 말 그대로 쑥대밭으로 변했는데 이를 소재로 삼은 <게르니카>는 피카소가 했던 말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예술가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일에 무관심할 수 있나. 회화는 아파트나 치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미술관에는 피카소의 <게르니카> 외에도 살바도르 달리나 호안 미로의 작품도 꽤 있으며 더 나아가 아예 스페인의 근현대 미술을 아우른다. 부지도 제법 넓고 소장 작품 수는 1만 점도 넘는, 생각보다 꽤 큰 규모이니 최소 반나절 정도는 시간을 투자할 각오 후 방문하자.
주소 : C. de Sta. Isabel, 52, 28012 Madrid, 스페인
운영시간 : 10:00~21:00 일요일은 14:30까지, 화 휴무)
홈페이지 : https://www.museoreinasofia.es/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는 명실상부 가우디의 도시지만 이 동네에도 놓치면 아쉬운 미술관은 분명 있다.
# 피카소 미술관
피카소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거나 피카소의 이름을 달고 있는 미술관은 많지만 이 곳은 피카소 초기 ‘청색시대’의 작품들과 소년 피카소의 소위 ‘잘 그린 그림’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 곳에서 진짜 집중해서 봐야하는 작품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피카소가 44가지 버전으로 재해석해낸 연작들일 것이다.
피카소는 위대한 고전 작품을 본인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한 작품을 여럿 남겼지만 그 중에서도 이 곳의 <시녀들>이 위대한 것은 그 과정 전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작에 등장하는 인물을 하나하나 떼어 부각시킨 것도 있고 아예 전체적으로 재구성한 것도 있고 인물을 조금 더 오른쪽으로, 혹은 왼쪽으로 배치하면 어떨까, 인물의 위치가 바뀌면 그에 맞게 조명의 위치도 수정해야겠지? 색상은 어떻게 바꿀까? 가로와 세로를 바꾸어보면 어떨까? 등.. 방 한 칸을 빼곡히 채운 이 연작들에는 피카소의 여러 고민들이 담겨있다.
주소 : Carrer de Montcada, 15-23, 08003 Barcelona, 스페인
운영시간 : 10:00~19:00 (월 휴무)
홈페이지 : http://www.museupicasso.bcn.cat/
+가볼만한 곳 : '4 gats'
피카소가 즐겨 찾았다는 '4 gats(네 마리 고양이)' 카페도 멀지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곳은 19세기 말, 파리 몽마르트 언덕의 르 샤 누아르(Le Chat Noir, 검은 고양이라는 뜻) 캬바레를 모방하여 문을 연 곳으로 예술가들의 살롱으로 통했으며 피카소가 생애 첫 전시회를 연 곳으로도 유명한데 당시 전시된 작품들은 모두 '친구들의 초상화'였다고. 메뉴판의 그림 또한 피카소의 작품이라 눈여겨 볼 만 하니 함께 들러보자.
# 호안 미로 미술관
바르셀로나 태생인 호안 미로는 스페인 20세기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의 대표격인 화가이자 조각가이자 도예가이자 판화가로, 꿈 속에서나 떠 다닐 듯한 대상들을 단순명료하고 강렬한 색채와 곡선을 통해 율동이 느껴지듯 표현하는데에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최근 몇 년 새 한국에서도 미로의 전시가 열리는 등 미로가 조금씩 알려지는 분위기인데 미로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당시 스페인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활동 중) 과 이웃사촌이었고 함께 산책을 하며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고 하니 한국과의 인연은 어쩌면 예정된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
미로의 작품 300여 점을 산책하듯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는 이 미술관은 워낙 언덕 높은 곳에 있어 이 곳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르셀로나의 풍경 또한 끝내준다. 여행을 시작하며, 혹은 마무리하며 들러보는 것도 좋겠다.
길정현 작가 : 연세대학교 컴퓨터과학&응용통계학과를 졸업한 후, 대한항공에 11년 째 근무하며 틈틈히 여행을 다니고, 이 경험들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고작 5일>, <그리하여 세상의 끝 포르투갈>, <프로방스 미술 산책>, <고양이와 함께 티 테이블 위 세계정복>, <미술과 건축으로 걷다, 스페인>, <1일 1면식>, <예술가와 네 발 달린 친구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