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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한 그릇]

 

가늘고 길게와 굵고 짧게

 


글 _ 한성우(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국수의 참맛은 무엇일까? ‘국수’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그 뜻부터 짚어봐야 국수의 참맛을 논할 수 있다. 국수는 밀가루를 반죽해 길게 만들어낸 재료를 뜻하기도 하고, 이것을 주재료로 해서 국물과 고명을 함께 먹는 음식을 뜻하기도 한다. 첫 번째 뜻만으로도 국수의 맛을 논할 수 있다. 국수는 어떤 방법으로든 ‘가늘고 길게’ 뽑아낸 식재료를 뜻한다. 반죽을 밀어 얇게 편 후 칼로 자르든, 손으로 길게 잡아 늘이든, 틀에 넣고 좁은 구멍으로 뽑아내든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가늘고 길게 만든 것이 국수다. 그러나 가늘고 긴 이 재료만으로 국수의 참맛을 논하기는 뭔가 부족하다. 굵고 짧지만 국수의 참맛을 더해주는 다른 무엇도 필요하다. 

 

두 번째 뜻의 국수에서도 맛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국수의 면발이다. 가늘고 길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로 자를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워야 하지만 그렇다고 불어 터져서는 안 된다. 적당한 탄력과 질감을 가져야 하지만 고무줄처럼 질겨서도 안 된다. 밀가루, 메밀가루, 쌀가루, 옥수수가루 등 반죽의 주재료가 무엇이냐에 따라 맛과 향이 저마다 다르니 각각의 특성을 극대화시켜야 한다.   

 

면발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는 국물이다. 비벼서 먹는 국수도 있지만 후룩후룩 먹을 때 함께 딸려오는 국물 맛을 빼 놓을 수 없다. 소, 돼지, 닭의 고기와 뼈에 장작불을 지펴 밤새도록 고거나 말린 멸치, 밴댕이, 새우 등을 함께 끓여 걸러낸다. 깨끗이 씻은 무와 파, 고추 등을 소금물에 담가 적당히 익혀 낸 동치미의 국물을 떠내기도 한다. 소문난 국숫집, 혹은 냉면집은 저마다의 비법 육수를 자랑한다. ‘국물’에 대한 원초적 집착이 있는 우리들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고명도 빠져서는 안 된다. 다져서 볶은 고기, 얇게 부쳐내 채를 친 지단, 들기름을 발라 구운 김 가루는 모두 국수 위에 더해지는 갖가지 고명들이다. 혹시나 맛이 심심할까봐 파, 마늘, 생강 등을 잘게 다져 고춧가루와 섞은 ‘다대기’도 함께 제공된다. 식초, 겨자, 설탕, 액젓 또한 입맛에 맞게 가미된다. 이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국수의 맛을 더한다.  

 

 

 

 

저마다 국수를 먹는 방법은 다르지만 각각의 방법에 대한 평가는 가능하다. 다대기를 잔뜩 넣어 먹는 사람은 가장 하급으로 취급을 받는다. 자극적인 양념 맛 때문에 면발과 국물의 맛을 느낄 수 없다. 고명 맛으로 먹는 것도 그리 높은 취급을 받긴 어렵다. 고명은 맛을 꾸미기 위한 것일 뿐 그것이 맛 자체는 아니다. 역시 국수의 쫄깃한 식감과 육수의 시원한 감칠맛이 국수의 참맛이다. 가늘고 긴 면발은 육수를 듬뿍 머금고 입으로 향한다. 그렇게 입속에 들어온 국수와 육수가 어우러져 참맛을 내는 것이다. 물론 고명과 다대기가 새로운 맛을 더할 수도 있다.  

 

어우러짐! 국수의 참맛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면발과 국물이 가장 중요하다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가늘고 긴 면발이 깊고 진한 맛의 육수와 어우러지는 가운데 굵고 짧은 맛을 주는 고명과 다대기도 필요하다. 갖가지 고명으로 부족한 영양소를 채울 수 있고, 적당한 자극을 주는 다대기로 느끼하거나 심심한 맛을 잡을 수도 있다. 국수의 본 고향이 어디인지 중요하지 않다. 고기 육수인지 채소 육수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고명의 재료가 어디서 온 것이고, 어떻게 조리된 것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모든 것이 어우러져 입안을 가득 채우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그 맛이 국수의 참맛이다.   

 

국수 한 그릇에는 삶의 갖가지 모습이 담겨 있다. 이왕 태어난 세상, 가능하면 길게 사는 것이 좋다. 길게 뽑아낸 국수를 사람의 명에 비유해 ‘명길이 국수’라고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길게 늘이면 늘일수록 가늘어지니 길이에만 집착할 일은 아니다. 깊고 진한 국물에서 ‘진국’이란 말을 건져낼 수도 있다. 누구나 싱겁고 경박한 사람보다는 진국으로 불리는 사람의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고명과 다대기처럼 굵고 짧지만 변화를 주는 요소도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삶은 너무도 지루하고 밋밋하다.   

 

국수에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모습도 투영해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오랜 기간 동안 ‘단일민족’을 강조해 오다가 어느 날부터 ‘다문화’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결혼, 취업 등을 이유로 우리나라에 외국인들이 많아지자 우리 사회의 변화된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다문화 사회라고 하지만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미국과는 사뭇 다른 것도 사실이다. 미국은 태생적으로 여러 인종과 민족이 어울려 만들어진 나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대대로 이 땅에 살아오던 다수의 사람들과 최근에 들어오기 시작한 다른 땅 출신의 소수의 사람들이 어우러지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의 다문화 사회는 국수처럼 맛을 내야 할지도 모른다. 이 땅에 대대로 살아온 다수의 사람들은 면발과 국물처럼 참맛을 내야 한다. 새로이 들어온 사람들은 고명과 다대기처럼 새로운 맛을 더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차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국수의 참맛을 낼 수 없고, 어느 하나가 빠지면 국수의 제맛이 날 수 없으니 모든 것이 잘 어우러져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길고도 굵게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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