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한 그릇]
가루의 슬픔과 반죽의 영광
글 _ 한성우(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밥상의 같은 대상을 두고도 표현에 따라 그 어감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밥이 없어서 먹는 음식’과 ‘밥맛이 없어서 먹는 음식’이 그것이다. 전자는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하는 음식이지만 후자는 먹고 싶어서 먹는 음식이다. 도대체 어떤 음식이기에 이렇게 다른 대접을 받는 것일까? 밀가루로 만든 음식이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귀한 대접을 받아 ‘진가루’라고 불리기도 하던 밀가루로 만든 음식은 세대에 따라서, 혹은 사람에 따라서 확연하게 다르게 느껴진다.
쌀과 밀은 인류의 삶을 지탱해 온 중요한 곡물이다. 쌀은 밀에 비해 재배되는 지역이 좁지만 인구가 밀집된 아시아 지역에서 ‘밥상의 주인’이다. ‘밥상의 주인’이라는 말 속의 ‘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쌀을 알곡 상태로 익힌 밥을 지어 먹는다. 밀은 매우 넓은 지역에서 재배되며, 세계 곳곳 사람들의 ‘식탁의 주인’이다. 쌀과 달리 밀은 알곡 상태로 먹는 일은 드물어 가루로 만든 뒤 반죽을 하여 빵이나 파스타 등으로 만들어 먹는다. 인류를 떠받치는 두 곡물이지만 하나는 알곡 상태로, 다른 하나는 가루 상태로 먹는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난다.
쌀과 쌀로 지은 밥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밀과 밀로 만든 음식은 낯선 곡물이자 음식이다. 밀은 우리의 기후와 토양에 잘 맞지 않기 때문에 과거에는 귀했다. 이런 이유로 밀로 만든 국수나 만두 등은 꽤나 사랑을 받는 별식이었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별식이었지 주식은 아니었다. 알곡 상태로 차지게 지어진 밥으로 배를 채워야 우리는 비로소 안도감을 느낀다. 밀가루가 귀해서 특별하게 느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밥을 대신할 만한 음식은 아니다.
이런 인식은 밀가루와 밀가루로 만든 음식이 흔해지게 되면서 더욱 증폭된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미국의 원조로 밀가루가 대거 들어와 우리의 부족한 식량을 대체하게 되었다. 쌀의 대체재 혹은 보충재의 역할을 하다 보니 밀가루는 홀대를 받게 된다. 서양인들에게는 주식이지만 우리들에게는 쌀이 부족해서 먹는 곡물이니, 오히려 미움을 받기 십상이다. 보리는 그나마 쌀처럼 생겨 밥을 지을 수 있지만 밀가루는 국수, 수제비, 빵 등으로 가공을 해야 먹을 수 있다. 먹어도 밥처럼 든든하지 않으니 간식이나 새참으로는 괜찮아도 밥 대신 먹을 만한 것은 못 된다.
국수의 대중화와 라면의 등장 또한 밀가루의 지위를 떨어뜨리는 역할을 했다. 국수와 라면에 대한 인상은 세대마다 다르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별식이지만 나이 든 세대들은 밥이 없을 때 먹는 대체식이다. 어쩌다 밥이 부족하거나 밥을 하기 싫을 때 간단하게 끓여 먹는 점은 같지만 쌀이 없어서 밥이 없는 것과 쌀은 있어도 밥이 없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나이든 세대들은 당연히 쌀이 없어 밥을 못 지었을 때 먹는 것이니 국수와 라면에 대한 인상이 좋을 리가 없다.
가루를 만들어 조리를 해야 하는 특성 때문에 밀가루로 만든 음식은 분식이라 불린다. 분식의 분(粉)은 가루를 뜻한다. 어떤 곡물이든 가루를 낼 수 있지만 분식의 가루는 밀가루를 뜻한다. 단어의 구성이나 쓰임이 우리로서는 낯설 수밖에 없는데 아마도 일본어의 ‘훈쇼꾸(粉食, ふんしょく)에서 온 듯하다. 1970년대 혼분식을 장려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말 속에 깊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사전에서는 ‘가루음식’으로 순화하라고 되어 있지만 이렇게 해서는 느낌이 전혀 달라지기 때문에 사전의 지시대로 쓰는 사람은 없다.
밀가루의 대중화는 새로운 형태의 식당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된다. ‘분식집’ 혹은 ‘분식점’이 그것이다. 이름대로라면 밀가루 음식만 팔아야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오늘날의 분식집은 밀가루 음식을 파는 집이 아니라 만만한 식당이다. 김밥집으로 시작을 했든 떡볶이집으로 시작을 했든 오늘날의 분식집은 라면, 김밥, 떡볶이, 순대 등을 모두 판다. 순두부 백반이니 된장찌개 백반이니 하는 백반 종류도 판다. 만두도 팔고 떡국도 팔고, 돈가스와 우동 등 이것저것 그리 값이 비싸지 않은 것들을 죄다 판다. 본래 밀가루 음식을 파는 집이었을지 모르지만 오늘날에는 식당의 틈새를 파고들어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들의 한 끼를 책임진다.
분식과 분식집에 대한 홀대는 밥에 대한 집착과 관련이 있다.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알곡 상태의 밥을 선호하다 보니 풀풀 날리는 가루를 좋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밀가루는 가루를 먹는 것이 아니라 반죽을 한 후 갖가지 음식으로 가공을 해서 먹는다. 밀가루를 반죽해 만드는 것으로는 빵과 국수가 대표적이다. 우리는 ‘빵’이란 이름으로 뭉뚱그려 부르지만 밀가루 반죽은 방법과 재료의 변주에 따라 수많은 종류의 빵으로 거듭난다. 우리의 국수와 비슷한 파스타 또한 갖가지 모양으로 가공된다. 여기에 과자류까지 더하면 밀가루로 만드는 음식의 종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가루는 보잘것없다. 하지만 가루에 물을 부어 만든 반죽은 다르다. 입김만 불어도 풀풀 날리던 그것이 온갖 음식으로 탈바꿈한다. 탈바꿈한 것은 밀가루만은 아니다. 밀가루로 만든 음식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그렇다. 밥이 없어서 먹는 음식이 아니라 밥을 대신해 밥보다 더 맛있게 먹는 음식으로 어느새 바뀌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음식에까지 적용된 것일까? 과거에 밥이 없어서 먹었던 밀의 가루는 슬펐지만 오늘날 온갖 음식으로 탈바꿈할 준비가 되어 있는 반죽은 밥이 차지하고 있던 영광스런 자리를 넘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