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한 그릇]
소냐 피냐 그것이 문제로다
글 _ 한성우(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인간이 먹는 모든 음식이 인간의 삶과 관련이 있으니 모든 음식은 인간적이다. 그런데 그 유래만으로도 인간미가 철철 넘치는 음식이 있으니, 바로 만두다. 이야기는 위, 촉, 오 3국이 중원의 패권을 놓고 다툼을 벌이던 시절, 촉의 제갈공명은 남쪽 오랑캐를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심한 풍랑을 만나게 된다. 사람의 머리 49수를 물의 신에게 바쳐야 풍랑이 잦아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제갈공명은 생사람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밀가루를 사람의 머리 모양으로 빚어 제사를 지내 풍랑을 멈추게 했다. 이것이 만두의 유래이다.
사물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듯 이야기도 지어낸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음식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지도 않고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서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만두가 본래 사람 머리 모양이니 사람 머리 모양을 한 만두가 제사상에 올랐을 뿐이다. 음식점마다 유명인이 다녀갔다는 흔적을 남기듯이 만두도 유명인을 끌어들여 이야기를 지어낸 것일 가능성이 높다. 만두에 관련된 스토리텔링이자 만두의 마케팅 기법일 뿐이다.
여러 가지 재료를 한번에 즐기고 싶은 것은 음식을 먹는 이들의 당연한 소망이다.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 갖가지 재료를 얇고 넓은 것으로 싸서 먹기도 한다. 이 방법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만두다. 고기와 채소를 다져 소를 만들고 밀가루를 얇게 펴서 피를 만들어 둘러싼 것이 만두다. 둥근 피에 소를 넣고 반으로 오므리면 반달 모양이 되고, 피 전체를 위로 모아 오므리면 사람 머리 모양이 된다. 만들다 보니 사람 머리 모양이 된 것이지 사람 머리 모양을 본떠 만든 것은 아니다. 사람 머리를 입에 넣으면서 기분이 상쾌할 이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만두와 같은 방법으로 소를 넣되 소가 아닌 피가 주인공인 음식이 있으니 송편이 그것이다. 쌀을 곱게 가루로 만들어 익반죽을 한 후 두툼하게 펴 그 안에 팥, 깨, 콩, 밤 등을 소로 넣어 쪄낸 것이 송편이다. 밀가루 반죽이 아닌 멥쌀가루 반죽이 쓰이는 것,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만든 소가 아닌 한 가지 재료로만 만든 소를 넣는 것이 다르다. 솔잎을 깔고 쪄서 송편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빚어낸 것을 김으로 쪄내는 것은 만두나 송편이 다를 바 없다.
재료와 만드는 방법이 이렇다 보니 ‘만두는 소, 송편은 피’라는 공식이 생겨났다. 만두는 그 안에 채우는 소의 맛으로 먹고, 송편은 멥쌀가루로 두툼하게 빚어낸 피의 맛으로 먹는다는 것이다. 만두의 피는 무조건 얇아야 하고, 송편의 소는 너무 과해서 삐져나오면 안 된다고 우리 모두 믿고 있으니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가끔씩은 얇으면서도 쫄깃한 만두피의 식감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 송편 안에 채워진 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이런 공식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만두와 닮아 있는 이웃나라의 음식을 살펴보면 이 공식은 더더욱 성립되기 어려움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소를 넣지 않고 밀가루로 빚어 쪄낸 것을 만두, 소를 넣은 것을 교자(餃子)로 구별한다. 우리에게는 앞의 것은 떡이고, 뒤의 것만 만두이니 ‘만두’라는 말은 같되 가리키는 음식은 다르다. 우리 눈에는 물만두 혹은 만둣국로 보이는 ‘혼둔(混?)’은 더 복잡하다. 이 음식은 밀가루로 만든 얇은 피에 고기소를 넣고 국물을 많이 잡아 끓인 것이다. 이것이 일본에 전해져 ‘운동’이라 불리다가 만두가 아닌 국수의 일종인 ‘우동(うどん)’으로 발전한다. 이쯤 되면 ‘만두는 피’라는 공식은커녕 만두의 정의나 경계가 모호해진다.
‘소냐 피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제목으로 시작했는데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는커녕 혼란만 부추긴 셈이 됐다. ‘만두는 소, 송편은 피’라는 공식을 깨면서 더 복잡해졌다. 그런데 이러한 혼란과 복잡함이 본래 의도한 답이다. 사람으로 치면 피는 외면이고 소는 내면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생김새, 옷차림, 화장 등은 피에 해당되고,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성품, 인격, 마음 씀씀이는 소에 해당된다. ‘사람은 소냐 피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한 것이니 혼란스럽고 복잡한 것이 오히려 어울린다.
사람의 피와 소, 즉 외면과 내면 중 어느 것을 중시해야 할 것인가? 어른들에게서, 그리고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한다면 당연히 소, 즉 내면이다. 그러나 연륜과 만남의 깊이가 얕을수록 먼저 들어오는 것은 피, 즉 외면이다. 피가 두꺼운 만두는 맛없는 만두로 치부하듯이 외면에서 호감이 느껴지지 않으면 내면까지 파악해볼 시도도 안 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내면의 아름다움은 교과서에서만 강조될 뿐 현실에서는 외면을 가꾸는 방법만을 논하기 일쑤다.
소의 맛을 즐기는 만두를 선택할 것인가, 피의 맛을 즐기는 송편을 선택할 것인가는 자유다. 사람을 바라볼 때 소와 피 중 어느 쪽을 중시할 것인가도 결국 개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는 문제다. 그러나 만두는 소, 송편은 피라는 공식 속에서도 사람들은 만두의 맛을 평할 때는 소와 피를 함께 논하고, 송편을 먹을 때는 안에 든 소를 보고 고르기도 한다.
‘소냐 피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질문은 양자택일(兩者擇一)을 강요하고 있지만 답은 이미 ‘양자택이(兩者擇二)’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답은 삶의 맛이 깊어질 때 비로소 찾을 수 있다. 어린 입맛에는 만두의 소가 끌리고, 어린 눈동자에는 사람의 피가 먼저 들어온다. 나이가 들어야 송편에서 느껴지는 심심한 피의 맛을 즐기고, 사람을 오래 대해 봐야 사람의 소가 눈동자가 아닌 마음에 비로소 들어온다. 입맛도 그렇게 변하고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참맛도 그렇게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