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한 그릇]
그 나물에 그 밥의
어우러짐
글 _ 한성우(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비빔밥에 대한 이야기는 늘 기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원조에 대한 논쟁으로 끝이 난다. 비빔밥이 문헌에 골동반(骨董飯)으로 나타나니 중국의 음식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기원론의 시작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제사음식을 한데 섞어 먹은 데서 기원했다는 ‘음복설’, 동학혁명 시기에 부족한 음식을 한데 비벼먹었던 것에서 비롯됐다는 ‘동학혁명설’, 몽고 침입 시기에 초라하게 올릴 수밖에 없었던 수라에서 비롯됐다는 ‘궁중음식설’, 묵은 음식을 정월 보름에 먹었다는 ‘묵은 음식설’, 농번기에 음식을 한데 섞어 먹은 데서 기원했다는 ‘농번기 음식설’ 등으로 체계화된다. 원조에 대한 논쟁은 어느 지역의 어느 식당이 처음 비빔밥을 팔기 시작했냐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학문적으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너무나 당연한 것을 놓치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비비다’와 ‘말다’는 우리의 밥상에서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비비다’의 세 번째 뜻은 ‘어떤 재료에 다른 재료를 넣어 한데 버무리다’이다. 밥상 위에 밥과 찌개, 반찬, 젓갈과 각종 장류가 있다. 넓고 오목한 숟가락이 있으니 찌개나 장을 떠서 밥에 얹든 비비든 할 수 있다.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젓가락이 있으니 먹고 싶은 반찬과 젓갈을 집어 역시 밥에 얹어 먹어도 되고 비벼 먹어도 된다. 언제 어디서 누가 최초로 했는지 따질 필요도 없이 아주 오래 전에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비벼 먹었다. 결국 논쟁은 기록된 이름에 대한 기록과 팔기 시작한 식당에 대한 것일 뿐 음식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니다.
언제 누가 붙인 이름인지는 몰라도 ‘비빔밥’이란 이름에 대해서는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너무 익숙해져서 간과하기 쉽지만 ‘비빔밥’은 우리말의 어법에 영 어울리지 않는다. 문제는 ‘비빔밥’의 단어 구성에 있다. ‘비빔밥’이 ‘비빔’과 ‘밥’으로 나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밥’에 문제가 없으니 ‘비빔’에 문제가 있다. ‘비비다’와 ‘밥’이 모여 하나의 말로 만들어지려면 ‘비빈 밥’이나 ‘비빌 밥’ 혹은 ‘비비는 밥’이 자연스럽다. 나중에 생긴 말이긴 하지만 ‘덮다’가 결합된 ‘덮밥’도 있으니 이를 적용한다면 ‘비비밥’도 가능하다. 그런데 ‘비빔밥’은 이 중의 어느 것과도 같지 않다.
‘비빔밥’에서 ‘비빔’은 볶음, 찜, 조림, 무침과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진 말이다. ‘볶다’가 ‘볶음’이 되고, ‘찌다’가 ‘찜’이 되고, ‘조리다’가 ‘조림’이 되고, ‘무치다’가 ‘무침’이 되듯이 ‘비비다’가 ‘비빔’이 된 것이다. 볶고 찌고 조리고 무치는 것은 조리법이니 볶음, 찜, 조림, 무침이란 말이 만들어지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비비는 것은 먹는 방법이지 조리법이 아니다. 그러니 ‘비빔’이란 말이 먼저 있다가 ‘밥’과 결합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음식 중에 ‘계란찜’과 ‘찐 계란’이 엄연히 다르고, ‘찐 계란’을 ‘찜계란’이라고 하는 것이 영 어색한 것을 생각해봐도 ‘비빔밥’은 이상하다.
어찌된 일일까? 본래 ‘비빈 밥’인데 소리대로 적다보니 ‘비빔밥’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볶음밥 역시 ‘볶은 밥’인데 같은 기제에 따라 ‘볶음밥’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비빔밥의 ‘비빔’은 점차 ‘비빔국수’ ‘비빔냉면’ 등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이왕 ‘비빔’으로 굳어졌으니 ‘비빈’이 아닌 ‘비빔’으로 쓰이는 것에 대해 굳이 뭐라 할 수는 없다. 그렇게 굳어지고 그렇게 쓰이는 것이 말이다.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사는 연변의 식당에서는 종종 메뉴에서 ‘비빈밥’이란 표기가 발견되곤 한다. ‘비빔밥’이 규범으로 정해졌으니 ‘비빈밥’은 틀린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빔밥’보다 오히려 규범에 더 맞을 수도 있다. 본래 틀린 것이지만 익숙해지다 보니 맞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본래 맞는 것이지만 자주 접하지 못하게 되는 틀린 것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비빔밥은 어찌 보면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밥상 위의 밥과 반찬을 큰 그릇에 쓸어 넣고 비비면 결국은 그 나물에 그 밥을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음식으로서의 비빔밥은 남은 밥과 반찬을 알뜰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 밥과 반찬을 조화롭게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전자와 같은 비빔밥은 아무래도 격이 떨어지니 후자와 같은 비빔밥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