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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한 그릇]

 

집 나간 며느리의 슬픔

 


글 _ 한성우(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가족 구성원 중 하나인 며느리가 전혀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가끔씩 등장하곤 한다. 분홍색의 꽃에 하얀 밥알 두 개가 붙어 있는 식물의 이름이 ‘며느리밥풀꽃’이고, 덩굴과 가지에 갈고리 모양의 가시가 달려 있는 식물의 이름은 ‘며느리밑씻개’이다. 며느리가 혼자 먹으려고 몰래 밥풀을 감춰 놓은 듯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에서 며느리에 대한 강한 불신이 느껴진다.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뜯기는 풀로 밑을 씻으라고 하는 이름에서는 며느리에 대한 원초적 증오가 느껴진다. 과거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가족의 새로운 구성원으로서 집안의 살림을 일으키고 대를 이을 자손을 낳고 키워내는 며느리에대한 인식이 서럽다.

 

음식과 관련된 말에서도 뜬금없이 며느리가 등장하곤 한다. 가을에 가장 맛있다는 전어를 굽는 냄새가 하도 좋아서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전어의 고소한 맛이 떠오르는 ‘가을 전어는 깨가 서 말’이란 말과 함께 전어를 계절 음식으로 등극시키는 데 일조를 한 표현이기도 하다. 며느리가 왜 집을 나갔을까, 혹은 겨우 전어 굽는 냄새를 핑계로 돌아올 만큼 멀리 떠나지 못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풀 이름 속의 며느리만큼이나 슬퍼진다. 그러나 거짓과 과장이 섞이기는 했지만 생선의 맛을 이처럼 멋지게 표현하기도 쉽지 않다는 점에서 웃으며 받아들일 만하다.

 

그런데 ‘생선’은 또 서럽다. ‘물고기’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생태계의 당당한 구성원인 어류가 서럽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서럽다는 것이다. 한자어 ‘生鮮(생선)’은 ‘살아 있는 신선한’이란 뜻이고 ‘물고기’는 ‘물에 있는 고기’란 뜻이다. 그 이름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 생물을 오로지 인간의 먹거리로만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 먹기 좋은 것은 산 채로, 혹은 상하지 않은 채로 먹어야만 한다는 이름이다. 어차피 사람만 말을 쓰니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이름을 짓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보면 서러운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물속에는 수많은 생명체가 산다. 최초의 생명체도 물속에서 출현했다고 추측할 만큼 물은 생명의 원천이자 많은 생명체를 품고 있다. 그런데 물은 뭍과는 사뭇 다르다. 인간은 물속에서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을 잡으려면 온갖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낚시, 그물, 통발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억지로 물을 떠난 이 생명체들은 오래 견디지 못한다. 바로 목숨이 끊어질 뿐만 아니라 쉽사리 부패한다. 그러니 오로지 먹거리로서 대하는 ‘물고기’를 넘어 싱싱해야 한다고 강박하는 ‘생선’이란 이름까지 붙은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생선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소금을 뿌리는 것도 방법이고, 말리는 것도 방법이다. 때로는 갈아서 가공하기도 한다. 어쨌든 인간은 소중한 먹거리를 알뜰하고도 맛있게 먹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그만큼 물고기는 인간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중요한 존재다. 오늘날도 문명과 고립되어 혼자 살게 된다면 산속보다는 물가가 낫다. 산속에도 단백질 공급원이 많이 살지만 물속에 더 많이 살고 있고 잡기가 더 쉬울 때도 많다. 물가에서 구석기 시대의 조개무지가 발견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이런 이유로 생선 혹은 물고기의 이름에는 꽤나 많은 이야기가 얽혀 있다. 몸통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큰 입으로 굶주린 귀신처럼 아무것이나 먹는다 해서 이름이 붙여진 ‘아귀’는 한때 ‘물텀벙’이라고 불렸다. 그물에 걸리면 재수가 없어 바다에 바로 던질 때 나는 소리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는데 지금은 비싼 돈을 내고 먹어야 하는 식재료가 됐다. ‘명태’부터 시작해 최근에 등장한 ‘먹태’까지 그 이름이 수십 가지가 되는 것도 있다. 본래 ‘돌묵’ 정도의 이름이었을 텐데 임진왜란 시기의 선조 임금까지 끌어들여 거짓말을 지어낸 ‘도루묵’도 있다. 어느 것이든 고마운 식재료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담긴 이야기들이다.

 

 

 

 

조기 또한 이야기에서 빠질 수가 없는데 엮어서 말린 ‘굴비’와 ‘자린고비’ 이야기가 그것이다. 고려시대에 난을 일으킨 이자겸과 연관 지어 굴비가 ‘굽히지[屈] 않겠다[非]’는 뜻에서 왔다는 설은 그저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매달아 놓은 굴비를 보며 맨밥을 먹었다는 이야기 속의 ‘자린고비’도 그 어원에 대한 설이 분분하다. 그래도 이 이야기는 가슴에 새기는 것이 좋겠다. ‘살아 있는 싱싱한 물속의 고기’를 너무 좋아하다 보니 그 씨가 말라가는 상황이 됐다. 잡아서 먹는 것도, 길러서 먹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 됐다. 자린고비처럼 아껴 먹지 않으면 후손들은 사진 속의 죽은 고기로만 접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되면 집 나간 며느리를 다시 집에 불러들일 냄새도 피울 수 없는 슬픈 상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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